학창 시절, 커피는 독이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커피는 아이들 먹으면 죽는다고.
그 말을 믿으면서도 호기심을 못 이겨 어느 날 몰래 자판기 커피를 마셔봤습니다. 죽지 않더군요.
이상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독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독을 부모님이 밤샘공부 때 맥심 한 잔으로 타주셨습니다. 극약처방. 커피는 그런 물건이었습니다.
그 인식이 바뀐 건 1997년 시애틀에 잠시 살았을때 작은 델리에서 알바를 하게 됐는데,
라떼를 팔아야 해서 스티머로 우유 거품 내는 걸 배우다 마셔보게 됐습니다.
항상 쓰기만 하다고 알았던 커피가 완전히 다른 음료가 됐습니다.
커피가 처음으로 그냥 음료처럼 느껴진 순간이었습니다.
스타벅스가 커피 산업의 판을 바꿀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없이 그냥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한국에도 스타벅스가 들어왔고 그 이후로 커피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바뀌건 같습니다.
약이거나 소수의 기호품이었던 커피가 기호식품이 되었고, 지금은 생활 필수품이 되어버린 거죠.
어느 나라에 가도 스타벅스에 들어가면 기본은 하니 신뢰가 쌓였고요.
어이없는 사연이 있는데, 2000년대 초, 외근 중 시간이 비어 남자 후배와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다음 날 회사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제가 게이라는 거였습니다. 데이트할 때 가는 커피숍을 남자끼리 갔다는 게
그 후배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스타벅스는 그 시절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남자 둘이 설명 없이 가면 안 되는 곳. 지금은 웃기는 이야기지만, 당시 그 브랜드가 얼마나 생소하지만 또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같습니다.
그런데, 그 브랜드가 지금 이 모양입니다.
운영사인 신세계가 스타벅스에 정치색을 입혔습니다. 중립지대여야 할 공간이 어느새 극우의 놀이터처럼 소비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스타벅스는 편 가르기의 한가운데 서게 됐습니다. 정치성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커피 한 잔 마시는 공간만큼은 그런 것과 무관해야 합니다. 커피 레시피에 정치 이념은 없으니까요.
어디선가 본 영상 하나가 생각납니다. 이탈리아에 사는 한국 분이 그러더군요.
여기는 트램도 못 고치고 실업률도 높고 나라가 엉망인데, 그래도 다들 내려놓고 사니까 마음은 편하다고.
완벽할 필요도 없고 누구일 필요도 없다고.
카페란 그냥 잠시 내려놓고 여유를 즐기면 그만인 곳이 되면 않되나요!
어느 순간 굿즈모으곳, 힙해보려고 가던 곳이 되더니, 이제는 이념대립과 극우,일베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리다니요
우리 삶이 너무 척박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만들려고 하고 우리는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가 깊은 브랜드를
혐오의 눈으로 바라봐야하다니 한심하고 답답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스타벅스는 내 돈 주고 가면 이상하게 보이고, 선물 받아서 쓰는 곳이 된 게 당연해졌습니다.
길을 걷다 기분 나빠지는 간판이 하나둘 늘어가는 시대에, 스타벅스까지 그 목록에 들어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브랜드란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고 무너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걸, 신세게가 여실히 보여주네요.
스타벅스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닙니다. 커피는 커피고, 스타벅스는 스타벅스입니다. 미국 본사가 직접 운영하든,
브랜드 가치를 이해하는 다른 사업자에게 판권이 넘어가든, 어떤 방식이든 신세계 손을 떠나야
이 브랜드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편히 쉬고 맛있는 커피 마시면 그만인 곳으로.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