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시험기간만 되면 책이 그렇게 재밌었습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들이 시험기간만 되면 보물처럼 느껴졌죠. 처음에는 먼나라 이웃나라부터 삼국지를 읽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장길산,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까지 손이 갔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드래곤라자입니다. 당시 대학가 대출 서적 1위 소설이라는 기사를 보고 모아둔 용돈으로 처음 제 돈 주고 산 책이었습니다.
스토리도 재밌었지만, 제가 여러 번 읽었던 이유는 각기 다른 종족들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서사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과 그 본성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 다른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인간과 드래곤, 엘프처럼 서로 다른 존재들이 부딪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돌이켜보면 제가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삶을 간접적으로 살아보고, 주인공의 선택 앞에서 나 자신의 생각을 시험해보는 재미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소설과 다르더군요. 수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서로 다른 선택지를 상상해볼 수 있지만, 인생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써볼 수 없으니까요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 일 수는 있겠지만 군 생활을 DMZ에서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지만 전역하고 나서 돌아보니 그 시간은 결국 2년이었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그 안에서의 선택과 실수는 그 세계 안에서 마무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결정은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일, 가족, 친구, 앞으로의 삶. 지금 내리는 선택들은 몇 년이 아니라 어쩌면 평생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결정을 하고 후회를 한 적이 없었었는데 요즘 유독 고민만 하고 결정을 못내리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왜인지 지금은 그게 힘드네요
마지막으로 어렸을때 어린왕자라는 책을 선물 받고 읽으면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절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니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숫자와 데이터를 통해 의사 결정을 하고 어느덧 숫자보다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게 되더군요 어렸을때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가 딸의 남자친구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했지만 우주선 밖에서 대신 희생하는걸 보고 펑펑 울었는데 이제는 숫자만 아는 어른이 되었네요
그래서 요즘 문득 책을 다시 펼쳐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소설을 읽는다는 건 정답을 배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빌려 내 삶을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